ANNE GROS Identity



자신을 타인과 구별되게 하는 변하지 않는 본질 또는 그러한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이는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사전적 정의다. 사실 부르고뉴의 와인메이커들을 만날 때면 수십 번은 듣게 되는 표현은 바로 ‘테루아terroir’다. 그들은 부르고뉴의 고유한 특성을 이 한 단어로 요약하길 좋아하며, 테루아라는 개념이 부르고뉴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낸다고 믿는다. 하지만 테루아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은’ 즉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자연적 조건들(지리학적, 지질학적, 기후적 환경 등)을 지칭하므로, 생산자의 역할은 소극적인 형태를 띠고 생산자의 개성이나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이처럼 부르고뉴라는 무대에서 와인이라는 희곡을 완성하는 주인공이 테루아라면, 생산자는 조연에 그친다. 그 어느 와인생산자도 이러한 역할에 불평하지 않지만,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냈을 때는 무대를 빛낸 조연으로써 갈채를 받으며 관객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다. 르루아(Lalou Bize Leroy, 도멘 르루아 소유)를 잇는 차세대 여성 와인메이커로 기대를 모으는 안 그로(Anne Gros, 도멘 안 그로 소유) 역시, 21세기 부르고뉴라는 무대를 빛내고 애호가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뛰어난 조연 중 한 명이다.


ANNE GROS Identity 1 – 도멘 안 그로 Domaine Anne Gros

“그 당시 저는 열여덟 살이었어요. 함께 식사를 하던 도중 아버지가 제게 ‘이제부터 함께 와인을 만들어보지 않겠니’라고 물으셨죠. 저는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지요.”

프랑수아 그로(Francois Gros)의 외동딸이었던 안 그로가 도멘의 운영을 맡게 된 것은 20여 년 전인 1989년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와인은 병입되지 않은 채 네고시앙에 판매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프랑수아 그로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도멘의 명성은 오늘날같지 않았다. 하지만 안 그로가 도멘을 운영하면서 꾸준히 양조 설비를 개선하고 포도밭을 확장해 나갔으며, 와인을 직접 병입하여 판매하였다. 이와 함께 그녀의 와인들은 빠르게 명성을 얻었고, 1995년부터는 아버지의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을 붙여 ‘도멘 안 그로’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현재 도멘 안 그로는, 부르고뉴 AOC 와인과 3개의 그랑 크뤼 AOC 와인(Richebourg Grand Cru, Echezeaux Grand Cru, Clos de Vougeot Grand Cru)을 생산하고 있다(프리미에 크뤼 와인은 생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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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71년부터 지금까지 도멘 안 그로의 와인 레이블 변천사. 2001년 이후로 사용하고 있는 최근 레이블은, 짙은 피노 누아 색상에서부터 각 글귀의 위치와 내용 선택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 안 그로 본인이 관여했다고 한다. 그녀의 완벽주의자적인 면모가 엿보인다.


여느 부르고뉴의 와인생산자와 마찬가지로, 안 그로는 포도가 자란 땅의 특성이 와인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양조자의 몫이라고 말한다. 테루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만큼 와인은 섬세하고 조화로우며 우아한 특성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 와인양조자가 토양의 특성(또는 능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보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포도의 수확량을 조절하거나 포도밭 관리에 유기농법과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을 도입하는 등의 노력은 이러한 목적과 무관하지 않다.


ANNE GROS Identity 2 – 도멘 안 그로-장 폴 톨로 Domaine Anne Gros & Jean-Paul Tollot

“이 곳의 테루아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여기서 우리는 르네상스를 일으킬 겁니다.”

랑그독-루시용은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밸류 와인 산지로써 최근 들어 아주 흥미롭고 혁신적인 와인산지로 거듭나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름없고 단순하며 지극히 평범한 벌크 와인이 생산되어 물보다 저렴하게 판매되었다(우수한 소규모 산지가 있다 해도 매우 작고 고립된 지역에 불과했다)(‘더 와인바이블’, 캐런 맥닐, 2010). 또한 와인생산자들 사이에서 포도밭이나 구획별로 포도를 따로 관리, 양조한다는 개념은 자리잡지 못했고, 서로 다른 포도를 한데 섞어 와인을 양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도멘 안 그로-장 폴 톨로는, 안 그로가 남편 장 폴 톨로(Jean Paul TOLLOT, Chorey-les-Beaune에 Domaine Tollot Beaut 소유)와 함께, 랑그독-루시용(Languedoc-Roussillon)에 위치한 미네르브아(Minervois)에서 운영하고 있는 양조장이다. 20년이 넘도록 부르고뉴에서 와인을 만들어 온 그녀답게, 이 지역에서도 고유의 테루아를 보여줄 수 있는 와인을 생산하겠다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언제쯤 그 목표를 달성할 것으로 기대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2세대쯤 후”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따라서 포도밭의 성질을 파악하고 그 성질에 맞는 품종을 선별해서 관리, 양조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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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근 재정비된 도멘 안 그로-장 폴 톨로의 양조장. 현대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아래 와인들은, 도멘 안 그로-장 폴 톨로에서 생산하는 네 가지 와인들이다.

50/50 : 진정한 테이블 와인
50/50은 안 그로와 장 폴 톨로가 공동으로 노력을 기울인 와인임을 의미한다. 이 와인에 사용되는 세 가지 품종은 캬리냥, 생소, 그르나쉬로 각각의 포도나무 평균 수령은 30년, 40년, 18년 이상이다. 스테인리스스틸 탱크에서 숙성시킨 이 와인은 섬세하고 과일 풍미가 풍부하며 신선하다.

Les FONTANILLES : 미네르부아의 전형을 보여주는 와인
그르나슈, 시라, 캬리냥, 생소 네 가지 품종으로 만들어지는데, 캬리냥과 생소의 포도나무 평균 수령은 40년을 훌쩍 넘는다. 모든 품종의 풍미가 와인에 잘 드러나며, 신선하고 잘 익은 과일의 풍미와 함께 깊이와 여운을 지니고 있다.

La CIAUDE : 미네르부아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와인
석회암과 점토가 섞인 남향의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진다. 시라, 그르나쉬 외에, 수령이 각각 100년과 40년을 넘긴 캬리냥을 블렌딩한다. 와인은 매끄러운 타닌과 함께, 농축미, 섬세한 미네랄 풍미 그리고 훌륭한 산도를 지닌다.

Les CARRETALS : 백년의 세월을 담은 와인
1.07헥타르에 불과하지만 100년 이상 존재해온 포도밭에서 생산된 캬리냥으로 만든 와인이다. 이 와인은 풍부할 뿐만 아니라 섬세한 질감과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며, 복합적인 향과 함께 깊이와 여운을 선사한다. 십 년 이상 숙성 가능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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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멘 안 그로-장 폴 톨로가 생산하는 미네르브아 와인. 주황색은, 포도가 한창 익을 무렵의 포도밭 색깔을 표현한 것이다.


ANNE GROS Identity 3 – 가족

“아이들이 자라서 가업을 이어가겠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기쁠 거에요. 하지만 아이들이 나와 똑같은 와인양조자가 되길 바라지는 않아요. 나는 그들의 와인에 그들만의 정체성을 담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 그로가 와인을 만들어 온 20여 년의 세월은, 마치 끊임없이 발견하고 창조하고자 하는 본성 즉 그녀 본연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듯 하다. 하지만 안 그로는, 장 폴 톨로와 함께 세 아이를 키우고 세 군데의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그녀의 삶에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밀어붙이던 그녀가, 가족을 꾸려가면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생각을 공유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을 즐기게 된 것이다. 그녀는 수년 후 세 아이들이 세 개의 양조장(도멘 안 그로, 도멘 안 그로-장 폴 톨로, 도멘 톨로 보)을 각각 책임지고 돌보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그리고 이런 바램을 덧붙여본다. 그들은, 좋은 와인이 테루아를 그대로 드러내듯이 그들만의 정체성을 맘껏 드러내는 와인을 만드리라. 또한 훌륭한 와인이 지닌 조화로움처럼 그들의 삶도 조화가 가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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