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
와인은 존재한다
글 정휘웅 (네이버 와인카페 운영자)ㅣ사진 독일와인협회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라고 했다. 아마 초등학생들도 다 알고 있을 아주 흔한 문구이지만 이 문구가 뜻하는 바를 혹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이야기를 바꿔서, 자신의 이름이 왜 있는지 생각 해 보자. 로빈슨 크루소나 영화 <캐스트 어웨>를 떠올렸을 때, 과연 무인도에 따로 떨어져 혼자 있는 이에게 이름이 필요할까? 이름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남에게 불려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시인 김춘수는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했다. 이름이라는 것은 하나의 존재에 대하여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불러줌으로써, 이름이 있음으로써, 그 존재가 ‘인식’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인도에 홀로 떨어져 있는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타인에 의해 인식이 되지 않을 뿐 그들은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 자체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 하였고, 소크라테스는 모든 이들이 우선 자신의 존재를 깨달음으로써 다른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와인을 표현하는 글귀 중 우리가 자주 보는 말이 있다. 바로 “진실은 병 속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진실은 병 속에 있다. 와인의 실존은 그 와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와인이라는 것이 그저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와인을 부를 방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와인에는 이름이 존재한다. 와인 하나하나는 그 이름이 불려짐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존재가 된다. 그 이름은 와인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어 와인의 가격을 결정하거나 희소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특히 와인은 이름의 특수성이 더욱 더 부각되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적어도 와인 이름에서 동명이주(同名異酒)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 이름으로 치자면 동명이인이 거의 없다는 셈인데 참으로 독특하지 않은가? 종종 학교에서도 한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들이 있을 수 있고, 와인 업계에도 유명한 분들 중 동명이인이 있다.
와인에 있어서 동명이주는 거의 찾기 힘들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지역명과 등급을 쓰게 되면 다른 와인이 되어버린다. 와인은 자신의 꼬리표에 출신지와 집안, 태어난 시간의 기록까지 고스란히 남긴다. 와인의 레이블이 단순히 그냥 레이블이 아니다. 와인의 역사를 담아두고 지금 현재를 공유하는 하나의 매개체, 즉 몸짓이라는 병 안의 진실과, 우리의 눈이 레이블을 보고 인식하게 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와인의 이름과 레이블이다.
이 때문에 우리가 와인을 마실 때, 그냥 부어라 마셔라 하지 말고 와인의 이름을 한 번 지긋이 쳐다볼 필요가 있다(글씨가 휘갈겨 써 있어 알아보기 난해하다 해서 그냥 넘어가지 말자). 와인 병 하나하나의 레이블에는 와인의 모든 설명이 친절하게 들어있다. 앞면뿐만이 아니고, 뒷면 레이블도 읽어보자(대개는 여기에 다양한 정보들이 기재되어 있다). 불어든 이태리어든 영어든 상관없다. 그 이름을 우리가 눈으로 인식함으로써 와인은 세상에 온전하게 존재하는 셈이다. 존재로써 교감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와인의 레이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