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3월, 잰시스 로빈슨 MW(Jancis Robinson, Master of Wine)은 디캔터((Decanter)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 어떤 것보다도, 잘 만들어진 부르고뉴 피노 누아를 대할 때 가장 흥분된다. 하지만 이 와인들이 생산되는 보졸레와 꼬뜨 샬로네즈 사이에 위치한 조그마한 지역은 나에게 큰 실망감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 캘리포니아나 오레곤의 피노 누아 생산자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과 비용을 들이면서 출시한 직후에 마셔도 절대적으로 맛있는 피노 누아를 생산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르고뉴 피노 누아 생산자들은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부르고뉴의 그랑 크뤼급 피노누아는 제외하고)?”
“부르고뉴의 생산자들은 덜 비싼 와인을 만들 때조차도 위대한 와인을 만드는 양, 와인을 포도 껍질과 너무 오래 함께 두어(때론 포도송이의 줄기까지 넣은 채) 결과적으로 와인에서 거친 타닌이 느껴지게 만든다 … 그랑 크뤼 와인이라면 10-15년 정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겠지만, 사람들은 출시된 후 2-3년 내(사실 피노 누아가 매우 매력적인 시기)에 마실 수 있는 편안한 스타일의 부르고뉴 와인을 마시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떼루아(토양, 미세기후 등 포도재배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 자연환경)가 다르기 때문에 부르고뉴와 신세계의 피노 누아 스타일이 다를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잰시스 로빈슨은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칠레 ‘Cono Sur Pinot Noir 1993’의 경우, 영국 시장에서 4.5 유로 정도에 팔리고 있는 매우 뛰어난(extraordinary) 와인이다. 이 와인은 캘리포니아에서 와인을 만들었던 Ed Flaherty가 만들었는데, 마시기 편한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와 많은 점에서 닮았다. 당신들(부르고뉴 와인생산자들)은 그 이유를 칠레의 침바롱고와 캘리포니아 소노마의 러시안 리버 지역의 떼루아가 닮았기 때문이라고 할 텐가?”
콜차구아(Colchagua)는 칠레의 가장 역동적인 와인 산지이며, 웬만한 칠레 와인생산자들이 앞다투어 포도밭을 사들이며 개척해 온 지역이다. 나아가 칠레 와인 산업의 수도라고 불릴 만큼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코노 수르는 몬테스(Montes), 까사 라포스톨(Casa Lapostolle), 까사 실바(Casa Silva) 같은 와이너리들과 함께 콜차구아 지역의 key player 중 하나이다.
2009년 10월, Decanter.com의 칼럼을 통해 팀 아킨(Tim Atkin, MW)은 코노 수르의 수장 아돌포 후르타도(Adolfo Hurtado)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후르타도에 대해 칠레 와인 업계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면, 하나같이 그의 친절함과 인내심 그리고 정직함에 대해 언급한다. 특히 와인메이커로서 그가 지닌 재능, 세심한 주의, 혁신에 대한 열정, 칠레 최고의 와인을 만들고자 하는 사명감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1990년대 초 칠레의 유명한 카톨릭 대학에서 포도재배 및 와인양조를 전공한 후르타도는, 학업을 이수하는 동안 몬테스 와이너리에서 실습을 거쳤고, 이 때 칠레를 프리미엄 와인 생산자 반열에 올려놓으려는 아우렐리오 몬테스(Aurelio Montes, 몬테스의 대표이자 와인메이커)의 비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수년 후 콘차 이 토로(Concha y Toro, 칠레의 유명한 와인기업)가 투자한 코노 수르 와이너리에 합류한 그는, 이후부터 지금까지 코노 수르의 와인양조뿐만 아니라 경영전반을 책임지고 있다.
후르타도가 합류할 당시, 코노 수르는 지금까지 칠레 여느 와이너리에서도 시도되지 않았던 다양한 형태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993년에 설립되어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지닌 코노 수르는, 전통이나 역사 등 오래된 유물에 대한 집착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젊은 와이너리다운 혁신과 도전 그리고 품질 향상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왔다. 카사블랑카와 비오비오 등 서늘한 기후대의 지역을 개척하여 포도밭을 확장한 것, 각 포도밭마다 적합한 품종을 찾아내어 경작한 것, 경사진 언덕면에 포도밭을 개간한 것, 드립식 관개(drip irrigation) 방식을 도입한 것 등은 코노 수르의 그러한 노력들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들이다.
후르타도는 특히, 칠레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지 않은 품종들(리슬링, 게부르츠트라미너, 피노 누아 등)을 재배하여 와인을 생산하려는 시도를 수년 간 해왔고, 이러한 노력 끝에 전세계 와인애호가들로부터 인정받는 칠레 피노 누아를 내놓게 되었다. 코노 수르는 1993년부터 콜차구아의 침바롱고에 위치한 작은 구역에서 생산된 피노 누아를 사용하여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는데(잰시스 로빈슨이 ‘extraordinary new wine under 4.5 euro’라고 언급한), 후르타도가 코노 수르에 합류한 후부터는 당시의 피노 누아를 업그레이드 및 세분화하여 여섯 가지 다른 피노 누아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최고급 피노 누아인 Ocio, 20 Barrels, Vision, Reserva, 유기농 피노 누아 그리고 엔트리급 피노 누아).
후르타도는 1999년 “피노 누아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착수함과 동시에,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 장인인 마틴 프리에르(Martin Prieur, 도멘 자끄 프리에르의 대표이자 와인메이커)의 도움을 받아, 피노 누아 재배지 선택과 포도 재배 그리고 와인 양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코노 수르와 도멘 자끄 프리에르는 지난 10여 년 동안 이러한 협력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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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멘 자끄 프리에르Domaine Jacque Prieur. 부르고뉴에서는 넓은 편인 21헥타르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랑 크뤼급 포도밭이 5헥타르, 프리미에 크뤼급 포도밭이 12헥타르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25개의 다른 AOC 와인들을 생산하고 있다.]피노 누아는 병충해나 곰팡이 균에 감염되기 쉽고 수분이 쉽게 말라버리며 스트레스를 잘 받는 성격으로 인해 기르기가 매우 까다로운 품종으로 알려져 있다. 코노 수르의 피노 누아 재배 지역을 살펴보면 1)지중해성 기후 덕분에 봄-여름 동안 건조하며 온도가 너무 높지 않고 온화하다. 그리고 2)남극에서부터 칠레로 훔볼트 한류가 흐르고 3)안데스 산맥으로부터 공급되는 깨끗한 양수가 포도밭으로 관개되며 4)서늘한 기후대에 속해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피노 누아를 재배하기에 적격이다(후르타도는, 코노 수르의 피노 누아 재배지역들은 피노 누아를 재배하기에 최적의 산지들이며, 이 지역들을 발굴하는데 프리에르가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고 말한다).
코노 수르가 생산하는 프리미엄급 피노 누아인 Ocio와 20 barrels는, 칠레 피노 누아의 잠재성을 전세계에 전파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7 Ocio의 경우 영국의 권위있는 와인 매체인 디캔터가 주최한 World Wine Awards에서 10 유로 미만의 피노 누아 중 으뜸으로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후르타도 본인에게 있어서 역시 “지금까지 내가만든 피노 누아 와인 중 최고”로 남아있다. Ocio는 연간 500-1000 케이스 정도로 소량 생산되는 최고급 품질의 피노 누아이다.
코노 수르의 또다른 역작인 20 barrels 피노 누아의 탄생 배경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영국의 와인상인으로부터 칠레에서 생산된 프리미엄 피노 누아를 시음해 보고 싶다는 의뢰를 받았고, 코노 수르 피노 누아 중 20개의 배럴을 선택하여 영국으로 보냈다. 부르고뉴 피노 누아와는 달리 칠레의 피노 누아 와인들은 짙고 농축된 컬러를 보여주었고 과일의 향미가 매우 뛰어났다. 그리고 농축된 질감과 거칠지 않고 부드러운 타닌, 탄탄한 산미는 영국의 상인에게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갔다. 이후 코노 수르는 매년 20개의 피노 누아 배럴을 엄선하였고 이 와인들을 20 barrels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신세계 피노 누아의 가능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코노 수르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잰시스 로빈슨은 그녀의 칼럼에서 부르고뉴 와인생산자들의 ‘구태의연함’에 대해 쓴 소리를 하면서, 칠레의 Cono Sur Pinot Noir 1993 빈티지를 언급하였다. 신세계 와인생산국가들은 이 와인처럼 수년 간 묵혀두지 않고 2-3년 사이에 대중들이 맛있게 소비할 수 있는 피노 누아를 생산하고 있으며, 이들 덕분에 대중들은 그간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피노 누아 와인을 편하게(그리고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피노 누아는 비싼 고급 와인’이라는 인식으로 거리감을 두어 왔던 대중들에게, 이들 신세계 피노 누아 와인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의 취향을 한층 넓혀줄 수 있는 활로를 활짝 열어준 것이다.
(국내수입처: 동원와인플러스 02 589 3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