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정휘웅(네이버 와인카페 운영자)


필자는 1년에 약 1천종 가량의 와인을 시음한다. 와인업계 종사자라면 아마도 2~3천종의 와인을 시음하겠지만, 와인 애호가인 본인에게는 1천종도 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시음했던 모든 와인은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그 느낌을 글로 남긴다. 1980년대 인텔사의 회장이었던 고든 무어의 저서 중 하나는 “편집증 환자만이 살아남는다(Only the Paranoid Survive)”는 것이다.

편집증은 항상 긴장된 상태로 있는 것을 포함한다. 필자는 와인을 마실 때 긴장한다.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할 때에도 온 정신을 와인에 집중한다. 다만 그렇지 않은 척할 뿐이다. 시음노트를 쓰지 않으면 불안하다. 와인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면 전날 찍은 사진을 뒤지고 함께 자리 했던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어쩌면 이런 약간의 편집증, 강박에 가까운 생각이 지금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좋은 밑거름이 되기는 했지만, 단순한 호기심의 관점에서 출발한 애초와는 달리 이제는 쓰지 않으면 문제가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록을 남김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신 와인 하나하나에 대한 기억. 그 와인은 분명 세상에 존재했었으나 마시고 난 뒤에는 이름(레이블)만 남는다. 머릿속 기억은 너무나도 엉성하고 바스러지기 쉬워서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 와인들의 맛은 온데간데 없고, 그 자리와 사람들에 대한 기억만이 남을 뿐이다. 그 날 마셨던 와인은 깡그리 잊혀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 찬란한 밤을 지탱해 주었던 그 와인에 대해서 약간의 강박을 주어야 한다.

과거 어떤 블로거가 썼던 글이 기억난다. “살짝 미치는 것이 인생에는 도움이 된다”. 오늘 저녁에 친구들과 모여서 와인을 마신다고 생각을 해 보자. 매번 잔을 바꾸어달라고 해서 레스토랑을 번거롭게 할 이슈는 만들지 말자. 그러나 와인을 마시면서 그 와인 자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감각의 촉을 편집증에 이를 정도로 예민하게 세워보자. 다른 와인이 좀 섞여도 관계 없다. 잔이 어때서 어떠하다, 주변의 냄새가 나서 어떠하다 그런 것을 떠나서 깊이 와인과 교감하자. 그 와인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집중하자.

그 쾌감을 느끼는 것을 강박적으로 추구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와인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을 기억하고자 강박적으로 매달려보자. 살짝 미치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되듯, 와인에 대해서 혹은 내가 즐기고 취미로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약간의 강박은 오히려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처럼 마시는 것을 정상이라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과도한 부분을 개선하려 늘 애를 쓴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와인을 즐기거나, ‘맹목적으로’ 어떤 것을 먹어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박은 버리자. 그 대신, 와인과 교감하기 위한 강박을 조금은 가져보자. 적당한 긴장감으로 와인을 마시자. 오늘 밤도 와인과 충분한 교감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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