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과 내가 함께 사는 법



글쓴이 정휘웅(네이버 와인카페 운영자)



원고 의뢰가 들어왔을 때 한 편으로 고민을 했다. 와인에 대해 쓸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내용으로쓸 것인가? 짧은 지식이지만 공부하는 마음으로 쓸 것인가 아니면 자연스러운 글을 써야 할 것인가?

필자는 “바르지 않은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라고 생각했고, 와인을 마시면서 느꼈던 것들 그리고 그 감응의 깊이를 담담한 어조로 써내려 가는 것이 맞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온라인 와인커뮤니티를 운영하면서 떠올랐던 수많은 생각들, 그 생각 사이에서 무엇을 배웠으며 그것이 본인의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 써내려 가고자 한다.

필자의 전공은 인지과학이라는 학문이다. 심리학, 언어학, 전산학, 문헌정보학, 철학, 뇌과학 분야를 모두 연구해야 하는 추상적인 학문으로,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기계와 좀더 잘 상호대화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것을 일반화시킨다면 ‘다른 어떤 물질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여 서로 잘 교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학문이 추구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와인으로 돌아와서, 와인을 마실 때면 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와인을 입 안에 넣었을 때 와인이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 들으려 하고, 와인이 필자와 어떤 교감을 나누고자 하는지 느끼려고 하기 때문이다. 와인을 여러 사람들과 나눠 마시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와인을 입에 넣는 그 순간만은 ‘와인과 나’ 단 둘이 있게 된다. 입에 들어간 ‘와인과 나’의 혀는 서로를 탐닉하고 밀월을 즐긴다. 다만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은 주변인들과의 대화,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통신에 여념이 없겠지만 말이다. 즉 와인을 마실 때 동일한 시간선상에서 두 가지 행위가 일어나는데, 하나는 주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고 다른 하나는 시음이다.

와인을 시음한다는 것은 와인을 즐기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ISO 표준 잔에 와인을 조금 따르고, 블라인드로 시음하여 와인에 대한 기본적인 품질을 감별한다. 와인과 깊이 교감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다. 철저하게 타인의 방해로부터 자유롭고 오로지 ‘와인과 나(시음자)’만 존재하니 상당히 제약되어 있다. 이 때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으며 시음자는 단지 와인을 시음하여 평가하는 하나의 생체물리학적 기계일 뿐이다.

따라서 와인을 시음하고 감별할 때에는 사람도 없고 와인도 없다. 다만 ‘와인과 나(시음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서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감정이 배제되어 있지만 평가라는 하나의 목적이 있고, 이를 위해서는 와인에 대해서 조금은 냉정하지만 짧은 시간의 교감을 통해서 그 와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가장 근접하게 파악해야 한다. 이 때문에 와인 시음노트는 대체로 정형적이고 딱딱하며 진부하다. 어떤 때에는 형식주의에 사로잡히거나 와인을 수치로 평가해야 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대신 와인을 즐길 때에는 여러 지인들과 모여 시끌벅적하게 와인을 들이킨다. 누가 어떤 와인을 가져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와인을 매개로 많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쌓였던 스트레스를 그 시간만큼은 풀어내고 털어내며 배설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사람 > 와인”이라고. 필자 역시 이 말에 동감한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사람이 와인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신은 인간에게 포도를 선물했다. 그리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묵묵히 인간은 와인을 만들어낸다. 그 완성품을 매개로 사람은 즐거움을 찾는다. 사람이 와인을 마시는 목적은 평가가 아니라 결국 와인을 통해 자신의 위안을 얻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관점에서, 어떤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것보다는 “와인<-->사람” 즉 와인과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와인이 있기에 모인 것이고, 그 와인을 통해 기분이 좋아졌기에 이야기가 더 행복하게 이끌어지니 말이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얼마나 연결되어 있으며 어떻게 교감하느냐로 귀결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와인들은 다 존귀하며, 각 병 속에 있는 와인들은 지금 당장 당신과 교감하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다. 그 와인들을 하나하나 마심으로써 ‘와인과 나’는 서로의 존재감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감할 때 우리는 마음의 위안을 얻고 평안과 휴식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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