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비디오와 함께 한 주의 휴가를 잘 보낸 스테판은, 오랜만에 돌아온 사무실에서 버릇처럼 메일을 확인했다.

"귀하의 계좌에 5 통의 메일이 도착해 있습니다 "

으이? 왠 메일이 이렇게 많이...

모두가 각국의 피노 누아 생산자들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휴가를 떠나기 전에 스테판은 함께 프랑스에서 공부했던 세계 각국의 동료 생산자들에게 피노 누아에 대한 견해를 물었던 것이다.

1999년 여름, 신선한 아침 햇살을 가득 받으며 Clos de Vougeot 포도밭에서 양조학 교수였던 프레데릭 선생이 한 말이 줄곧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자네들.. 이 피노 누아를 좀 보게. 한 손아귀에 잡히는 이 작은 포도송이가 지난 6세기 동안 부르고뉴의 영광을 가져 왔네..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이제 자네들이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그 곳에서 얘를 키우려면 속깨나 썩을 걸세..끌끌! "

먼저 독일에서 온 메일을 열었다.
선선한 기후를 선호하는 피노 누아의 특성을 잘 아는 독일의 빌헬름은 귀국하자마자 바로 피노 누아를 자기 포도원에 심었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Spatburgunder 라고 불리는데 단지, 특유의 과일 향을 얻을 수 있었을 뿐 부르고뉴의 복합미는 찾기 힘들다고 ..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북부 이탈리아 등지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음~ 그렇다면 ..일조량도 중요하다는 얘기군! "

이러한 스테판의 생각은 이태리의 로렌쪼에게서 온 메일을 열자 곧 확인이 되었다. 지중해의 더운 기후를 염려했던 그는 북동부 알프스의 산자락에 있는 밭떼기에다 실험적으로 피노 누아를 심었다.

고지대 경사지의 신선한 기운이 Blauburgunder (피노누아의 이태리식 이름) 의 완숙을 서서히 진행시켜 흔치 않은 복합미와 섬세함을 주었다는 것이다. 아직은 시험 단계라지만, 로렌쪼는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다.

" 녀석, 내가 늘 '마초' 라고 놀렸는데.. 이런 신중한 면도 있었군.. 후후 "

호주의 그림Greem 씨도 고군분투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왕년에 호텔에서 근무했다는 경력답게 사교적이었던 그림씨는 모든 화려한 생활(?)을 접고, 흙을 만지며 포도주를 만든다고 프랑스에 유학왔었다.

지금은 헌터 밸리 (Hunter Valley)와 쿠나와라(Coonawara)에 자리잡고 있는데, 뉴질랜드의 선선한 기후에도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다.

"많이 날씬해졌겠군.. *^^* "

'배둘레햄' 이 많았던 그의 몸매를 떠올리며 스테판은 씨익-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메일은 미국의 오레곤(Oregon)에서 날라왔다. 나파 밸리에 큰 포도농장을 가진 부친을 둔 피터 Peter는 함께 일하자는 아버지의 제안을 물리치고 오레곤에 정착했다. 프랑스에 있었을 때부터 부르고뉴 와인에 심취했던 그는 대단한 야심과 꿈을 가지고 귀국했었다. 헤어질 때, 그가 한 말.

"지금까지 우리는 힘 (Power)으로만 밀어붙여 그랑크뤼 와인을 만들어 내었지만, 나는 섬세함으로 승부를 걸어볼테야 !" 1

오레곤 주는 미국의 포도재배지역 중 가장 선선한 지역이다. 대륙성 기운이 북태평양의 바닷바람에 의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이곳의 피노 누아는 13도 이상의 알코올도수를 가지고 있지만, 기후가 선선하여 수확시기를 늦게 가져감으로써 만족할 만한 수중의 산도와 탄닌, 색상을 가진 복합미 있는 와인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스테판은 갑자기 1979년의 오레곤 쿠데타가 떠올랐다.

잔잔한 1979년의 어느 오후, Robert Drouhin 이 주최한 한 블라인드 테이스팅 경연대회는 전세계의 부르고뉴 와인 애호가들을 경악시켰다.

이 행사에서 물론 그랑프리는 Joseph Drouhin 의 "Chambolle-Musigny 1959" 에 돌아갔지만, 놀랍게도 2등을 차지한 것은 오레곤의 David Lett 의 "Eyrie vineyard 1975 Pinot noir" 였던 것이다. 그것도, Drouhin 의 "Chambertin Clos-de-Beze 1961" 를 누르고..!

늘 진자는 말이 많고.. 심사위원의 선정과...뒷얘기는 많았지만, 여하간 중요한 것은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힘" 과 "색상" 그리고 "향"을 인정 받았다는 것이며, 오레곤 피노 누아 와인의 미래에 희망을 주는 대사건이었다.

메일함을 닫는 스테판의 심경은 예사롭지 않았다.

사실, 고급품종의 반열에서 피노 누아 만큼 까탈스러운 얘가 또 있을까?
선선한 기후, 맑은 날씨, 너그러운 햇살.. 그리고 절대적으로 인내심 있는 조련사를 필요로 하니...

까베르네 소비뇽이 기꺼이 배낭을 꾸려 전세계를 누비고 다닌다면, 피노 누아는 마지못해 꿈쩍이는 듯한 느낌을 스테판은 받았다.

결국, 그랑 부르고뉴 와인은 부르고뉴 밖에서는 만들 수 없는 것일까.
무엇이 피노 누아로 하여금 부르고뉴를 짝사랑 하게 하는 것일까.

프랑스 부르고뉴.
말발굽 소리도 경쾌한...2000 년 전, 시이저를 앞세운 로마인이 발견한 황금의 언덕.
남북으로 길게 누운 절묘한 입지, 황금의 경사비율...

Beaune 를 지나면서 왼편으로 펼쳐지는 황금의 포도밭들, Corton, Vosne-Romanee, Chambolle-Musigny, Gevrey-Chambertin. 그 어느 하나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명품의 고향들.


이 땅에서 자란 피노 누아는 제비꽃 향에서 들짐승 향까지, 산딸기 향에서 송로버섯 향까지 온갖 향을 연출한다. 산뜻한 루비 색에서 검정 잉크 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팔레트를 가지고 있다. 이 황금의 언덕의 가장 성스러운 곳에 제왕 중의 제왕이 자리잡고 있으니, 그 검은 돌십자가와 돌명판이 피노 누아의 성지를 알려주고 있다.

"로마네 꽁띠(La Romanee-Conti)"

1,8 ha 의 겸손한 크기 그리고 절제된 생산량.
왕족의 품위와 정성이 깃든 역사.
1945년까지 필록세라에 저항한 프랑스의 자존심.


자연의 힘과 우주의 이치를 이용한 포도 재배법.

그리고 피노 누아를 잘아는 오베르 드 빌렌느 Aubert de Villaine 의 집념.
이렇게 탄생된 6,000병의 로마네 꽁띠.

끝없는 복합미에서 우러 나오는 섬세함과 우아함은 피노 누아가 로마네 꽁띠의

떼루아에서 지어낸 한 편의 시.
한없는 부드러움 속에서 느낄 수 있는 통뼈의 놀라운 기개는 정동향에서 받은 이른 아침 햇살의 기운이 깃들여 있음이니...

후우~ 스테판은 터질듯한 숨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길게 내뱉었다.
그 이름만 되뇌어도 그 생각만 하여도 찾아 드는 전율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다.

잠시 생각을 추수린 스테판은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았다.


그리곤 회신 메일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흥분한 스테판 ... 손놀림은 더욱 빨라지고... 답지않게 웅변조의 글이 이어졌다.

"친애하는 동지들, 아마도 피노 누아는 나의 대안이 아닌 듯하오.
동지들도 피노 누아를 가지고 '피노 누아 와인'을 만들려고 하지 마시오,
피노 누아를 가지고 '여러분의 와인'을 만들려고도 하지 마시오.


피노 누아가 뿌리 박힌 땅과 호흡하는 대기의 기운과 태양의 정기를 표현하도록 놔두시오. 이것이 로마네 꽁띠의 충고인 듯하오..."

스테판은 갑자기 자기가 제왕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중앙대 와인 소믈리에 과정 교수
손 진 호


1. 지금까지 미국인들은 Cabernet-Sauvignon 을 가지고 힘있는 와인을 만들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피터는 Pinot noir 를 가지고 섬세함과 복합미를 가진 와인을 만들어 보겠다는 결심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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