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슬링 (Riesling)의 '수다' 와 시라 (Syrah)의 '허무개그' 사이에서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한 우리의 스테판.

그는 머리를 크게 한 번 가로 저었다.

" 음, 이런.. 난 좀 휴식이 필요해... 하긴 뭐 그렇게 급할 것도 없지..."

머리가 이렇게 혼잡할 때 스테판이 즐겨찾는 여흥거리는 비디오 보기! 그것도 만화영화. 만화영화는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스테판이 좋아하는 여흥 메뉴였다. 물론 그 때는 불어를 마스터하기 위해서 더더욱 필요했던 것이었지만...

<뗑뗑Tin Tin>, <미녀와 야수>, <드래곤 볼 Z>... 그의 주옥같은 클래식 레파토리중에서, 아름다운 낭만과 감미로운 휴식이 필요한 스테판이 고른 오늘의 비디오는?... 맞았어! 아름다운 시골처녀와 무서운 야수와의 사랑이야기...

... 상영 중... " 훌쩍~ , 핑!"
... 상영 끝... "피이잉- !"

"역시 미녀와 야수는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야, 사랑의 힘은 그토록 위대한 것이고... 그 털복숭이 같은 야수가 그토록 멋진 왕자로 변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을까~ ?

메타모어퍼시스...! "

"...아! 그래, 맞어!! 마치 세미용 Semillon 과 같군!! "

스테판은 코를 잔뜩 푼 휴지가 아직 손 안에 있다는 것도 잊고 손으로 무릎을 탁 쳤다.

"물컹~ .. 으~ .. -_- "
(웬만해선 스테판을 말릴 수 없다...)

세계적 차원에서 재배되는 포도 품종 치고 세미용처럼 관심을 덜 받는 품종도 없다고 스테판은 늘 생각해 왔던 터이라, 정말 기쁘게 세미용을 불렀다.

"저는 저 자신도 잘 통제하지 못해요...기후에도 너무 민감하고...."

상당히 걱정스러운 듯 다소곳이 말하는 세미용이 스테판은 못내 안스러웠다. 저 어린 것이 얼마나 푸대접을 받았으면 저렇게 기가 죽었을까, 쯧쯧.

세미용은 누가 뭐래도 소위 '고급 품종 Noble variety' 에 속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또래들이 다양한 기후대에서 그런대로 적응을 잘 하는 반면 세미용은 기후에 훨씬 더 민감한 것이 문제이다.

서늘한 기후, 예컨데 뉴질랜드나 미국 위싱턴주 등에서 자란 세미용은 "풋내"가 강하게 나타나 소비뇽과 비슷한 느낌마저 보이며, 보다 더운 기후 지역, 칠레나 아르헨티나, 호주, 남아공 등에서 생산된 세미용은 별 특징이 없는 (개성이 없다는 것은 와인에겐 치명적이다) 그냥 평범한 여느 화이??와인과 같아진다.

" 아마 소출이 많은 것도 큰 문제중의 하나지요, 가지치기에 정말 신경을 써 주셔야 해요. 그래서 저를 잘 다룬 포도 재배자 라면 그 사람의 경륜과 실력은 알아주어야지요, 후후... "

허허, 녀석. 그래도 뼈대있는 가문이라 할 말은 다 하는구먼. 지탓이 아니라 이거지. 사실 세미용의 소출 조절에 실패하여 품질이 형편없이 저하된 경우도 많으니...그 말도 일리는 있구먼. 그러나 스테판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 녀석, 말쑥한 얼굴에 창백한 안색, 너무도 섬세한 피부는 쉽게 상처받을 수 있음에 걱정스럽기 까지 하다. 겉보기엔 풍성하게 부풀어 있지만 생기가 없어 오래 견디지 못할 운명... 그 누구의 도움이 필요할 것을...!

" 저의 주 무대는 프랑스의 Bordeaux와 호주의 Hunter Valley 야요. 사실, 다른 곳에서는 특별히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 곳에서는 마치 마술지팡이에 맞은 것처럼 신데렐라가 되지요. 유리 구두도 신겨주고, 황금마차도 태워주고... 호호호."

갑자기 생기가 도는 것을 보니, 이제 자기의 자신감을 찾았나 보다. 이제 더 이상 세미용에 대한 연민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생각한 스테판은 자기가 손바닥 보듯 꿰 뚫고 있는 한 고장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Graves, Pessac-Leognan.
적토마들이 할거하는 메독을 지나, 좀 더 여유롭고 넉넉한 자갈밭의 땅으로 올라가면서 흩뿌려놓은 백마들의 땅1 . 하루 일과가 끝나면 자전거로 구석구석을 누비며 다녔던 이 곳에서 스테판은 처음으로 보르도 화이트의 새로운 스타일을 보았었다.

레드와 화이트를 같이 생산하는 한 샤또에서, 어느 와인을 먼저 시음하겠냐는 안내원의 말에 "당연히 화이트 아닌가요?" 라고 반문했던 나에게 던진 그 심오한 미소의 뜻을 나중에야 알아차린 것도 바로 이 지역이었다.

"호호호, 스테판, 당신도 화이트를 먼저 마셨군요. 대체 그 긴 파워의 뒷끝을 어떻게 감당할려구요 ? "

후후, 녀석, 그렇게 뽐낼 건 없지, 네가 이렇게 완전히 다른 변신을 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두 명의 친구가 도와 주었기 때문이란걸 내가 모를줄 아니?


스테판은 눈을 가스름하게 흘겨 주었다.

"어머나 !... 당신이 그걸 어떻게...( 으~ 웬만해선 스테판을 속일 수 없다..) "

보르도의 경우, 세미용은 결코 혼자 쓰이지 않는다. Haut-Brion 이나 Laville-Haut-Brion 같은 드라이한 백포도주든, Sauternes 같은 스위트 와인이든 항상 소비뇽 Sauvignon 과 함께 사용된다. 힘과 내용은 있으되 운명적으로 향과 산미가 떨어지는 세미용에게 향이 풍성하고 산미가 강한 소비뇽은 둘도 없는 짝꿍이다.

이렇게 산도를 얻은 세미용은 숙성하면서 부케를 형성하는 능력이 뛰어난데, 특히 오크와의 친화력은 샤르도네와 비교할 정도로 뛰어나다. 이 친구와의 결합을 통해 색상은 더욱 진해지며 복합적인 향과 풍미를 더하게 된다.

"스테판, 좀 전에 제 연약한 피부에 대해 걱정하셨죠? 그런데...혹시.. '새옹지마塞翁之馬' ?遮?말 아세요? 하긴 이 글의 제목을 '미녀와 야수' 로 정할 때 뭔가 핵심을 알고 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세미용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뮌가에 취한 듯 또 날아가는 스테판. Garonne 강을 거슬러 한참을 더 날아가다 잔뜩 끼여있는 안개에 막혀 더 이상 날아갈 수 없었다.

여기는...두리번 두리번...거리는 스테판... 어스럼픗 보이는 중세의 성 하나...

"맞아요, 스테판. 나의 마법의 성에 잘 오셨어요. 저는 이 진한 안개에 사로 잡힌 세미용 공주랍니다. 이제 곧 보트리티스 시네레아 Botrytis cinerea 라는 야수가 나타날 거예요."

" 저의 이 보드라운 미세한 피부가 무서운 곰팡이균의 습격을 받는다는 걸 상상해 보세요,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이어요 ? 결국, 전 완전히 쭈글쭈글해지고 시커멓게 변해서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추한 존재가 되어가요... 흑흑흑 ..."

어휴~ 저 내숭... 다 알고 있으면서... (웬만해선 세미용도 말릴 수 없구나..)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온통 시커먼 곰팡이로 뒤덮인 이 "야수"의 탈 안에서 오묘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더니... 알코올과 당미를 높여줄 당분이 농축됨과 동시에 그 균형을 맞춰줄 고결한 산도가 신기하게 자라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휘리리리~링 " 하며 야수의 탈을 벗고 나타난 왕자는 황금빛 거룩한 Chateau d'Yquem!

정말 특별한 기후, 특별한 땅, 위대한 생산자가 만든 세미용 와인의 최고 걸작, 샤또 디껨 Chateau d'Yquem ! 1785 년 Lur Saluces 가문이 정성을 쏟은 이래 지금까지 그 귀족적 우아함과 고전적 단아함을 잃지 않는 전설적 와인.

포도 나무 한 그루에서 와인 한 잔을 만들어 내는 그 희생, 완전히 '귀부현상'에 도달한 포도알 만을 알알이 따기 위해 여러 번을 수확해야 하는 그 노력,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게 하기 위한 자연의 혜택… 이 모든 것의 중앙에 세미용이 있을 줄이야.

세상에 스위트 와인은 많으나 '귀부현상'이 주는 그 복합미묘함을 따라갈 수 없고, 더구나 세미용으로 만든 보트리티스 스위트 와인은 그 힘과 장기숙성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렇게 좋지 않은 기후에 이런 훌륭한 와인이…
스테판이 유독 욕심을 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가을 아침의 선선한 안개는 세미용의 생기도 돋구워 주며, 보트리티스균의 성장도 촉진할텐데...

다만 문제는 한국의 늦가을 낮기온이 안타까울뿐...
좀 더 온화했으면, 좀 더 건조했으면...

가져 온 이력서를 두고 나가는 세미용의 안타까운 목소리.

"스테판, 그러한 장소를... 찾.길.바.래.!! "

중앙대 와인 소믈리에 과정 교수
손 진 호


1. Pessac-Leognan은 레드와인과 화이트 와인이 균형있게 발전한 곳이다. 95%이상 레드와인을 생산하는 메독지방과 비교한다는 문학적인 의미에서 "백마들의 땅"으로 표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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