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 묵묵히 리슬링의 수다를 듣고 있던 스테판은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대충 자기 소개를 끝내주었으면 좋으련만... 이 수다스런 부인은 자기 PR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도무지 마이크를 놓으려 하지 않는다. 예의를 갖춰 돌려 보내려 했던 스테판의 계획이 자칫 무산될 바로 그 때 !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 온... 약간 중후한 이미지를 풍기는 그는 ...자신을 시라 (Syrah) 라고 소개했다.

약간 길쭉한 얼굴에 크기는 보통보다 작은 편, 햇볕에 상당히 그을렸는지 흑청색에 가까울 정도로 검푸르다. 저걸루 와인을 담그면 얼마나 진한 색깔이 나올까. 매끈한 피부는 얇고 팽팽해서 누르면 터질 것 같다. 다행히 질긴 편이어서 쉽게 물러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제 껍질은 까베르네 소비뇽 처럼 두텁지는 않아요. 하지만 몸집을 형성할 만한 충분한 탄닌은 가지고 있구요, 무엇보다도 제가 내는 진보랏빛 칼라는 정말 죽여주죠. 한가위 때 성묘가면 볼 수 있는 무덤가에 핀 할미꽃을 기억하나요 ? 바로 그 뉘앙스를 연상하시면 됩니다."

키는 중간 정도에 멧집이 단단해 보였다.1 리슬링의 호들갑에 혼이 빼앗겼던 터이라 스테판은 시라의 "무게"있는 프레젠테이션이 맘에 들었다.

"제 고향은 석유 많이 나는 중동의 한 지방입니다."

이 얘기에 스테판은 시라의 얼굴을 한번 더 힐끗 쳐다보았다. 음- 맞어, 어디서 많이 본 색깔이야. (원유를 많이 빨아 먹은게야...)

스테판은 문뜩 <와인의 역사> 수업시간에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포도가 재배되었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옛 페르시아 영토에 Chiraz 또는 Shiraz 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이 이름이 호주에서 부르는 시라의 이름과 일치한다는 말. 그래서 호주 사람들이 자기들이 부르는 "쉬라즈 Shiraz" 라는 이름이 불어의 시라 Syrah보다 더 정확한 원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저의 이동 경로는 확실치는 않지만, 페니키아인의 해상활동을 통해서 마르세이유쪽으로 전파되었거나 아니면 이집트를 거쳐서 프랑스로 들어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미 로마 점령기에 론 Rhone 계곡에 뿌리박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시라가 이렇게 자기의 족보를 주-욱 읊고 있을 때, 스테판의 생각은 이미 프랑스 론 밸리에 가 있었다. 유럽을 표호하듯 달리던 알프스 산맥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지중해쪽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생긴 그 가파른 언덕의 사면에 기적처럼 자라던 그 포도나무들을 기억한다.

퍽퍽한 화산토 골짜기를 적시는 론 Rhone강이 남으로 향하면서 만들어 놓은 명당자리들... Cote-Rotie, Saint-Joseph, Hermitage 그리고 한참 멀리... Chateauneuf-du-Pape...

"와인애호가에게 에르미타쥬Hermitage 는 '시라로 만든 와인'이상의 것이죠. 그 이름 뒤에 숨어있는 신비와 전설은 1961년 Hermitage La Chapelle 을 마셔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테판, 당신도 마셔보셨나요? "

갑작스런 시라의 격앙된 목소리에 스테판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이 녀석이 어떻게 내 생각을... 관심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말인가 ?

1961년, Hermitage La Chapelle!
뽈 자불레Jaboulet 포도원에서 만든 명품중의 명품. 스승인 Jean Frambourt 를 따라 Beaune에 내려갔다가 그 분의 친구와 함께 맛본 포도주. 여전히 청춘의 힘과 박력을 잃지 않았으면서도 노년의 성숙이 부께 Bouquet로 나타나 시라 고유의 향신료향이 사냥감 냄새와 삼나무향에 ?祈?恝?그 조화와 균형이 완벽했던 와인!

"저는 따뜻하고 건조한 기후를 선호하죠. 토양이 비옥하면 소출량이 많아져 걱정이지만, 화산지형의 침식토 같은 척박한 토양을 만나면 정말 "대형 사고" 를 칩니다. 보르도 그랑크뤼 부럽지 않은 와인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하하하!"

이렇게 론 밸리가 명실공히 시라의 최적의 Terroir라면, 남부 프랑스 지역에서도 시라는 점점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와인의 품질을 높이려 할 때 어김없이 원병으로 등장하는 것이 시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론 밸리의 시라 Syrah보다는 호주의 쉬라즈 Shiraz에 더 익숙해 있다고 들었어요. 제 사촌들이 호주로 건너간 것이 1832년이라고 한다면 한 15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사실 20세기 중반까지는 그렇게 주목받는 포도주는 아니었죠. 기후에 적응도 잘하고 튼튼해서 호주와인산업의 대량생산체제에 잘 적응을 했던 것이죠. 그 이미지를 벗는데 150년이 걸렸습니다."

사실... 그랬었다. 호주에서는 몇몇 생산자를 제외하고는 대량생산을 해대는 바람에 품질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Hunter Valley 의 와인메이커를 중심으로 '진지하게' 와인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되었으며, 그 노력의 최고 결정체가 펜폴드 사Penfolds 가 Barossa Valley 에서 만든 Grange Hermitage2가 아닌가.

또한 쉬라즈Shiraz에 Cabernet-Sauvignon 을 블랜딩하여 절묘한 향과 맛을 이끌어낸 것도 호주 와인산업 기술의 개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러니... 시라가 지금 목소리를 좌악 깔고 말하는 것이 아니야!.

스테판은 개인적으로 시라 포도주를 좋아했다. 깊은 암적색에 진보랏빛 톤이 감도는 그 아름다운 색상하며, 매콤한 이국적 후추가 상큼한 블랙베리와 만나 이루는 아로마가 삼나무향기 감도는 송로버섯향으로 발전되는 부께, 빼어난 산도와 탄닌이 만나 이루는 입맛의 풍족함 모두 시라Syrah가 최적의 토양과 기후에서 뿜어내는 저력이었다.

아! 이런 와인을, 이런 레드와인을 스테판은 한국에서도 정말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스테판의 꿈에 찬물을 뒤엎는 시라의 목소리.

"사실... 저는 춥고 습한 기후를 싫어하걸랑요. 그래서 론 밸리 북쪽이나 스위스, 뉴질랜드 등에서는 좋은 포도를 생산하기 쉽지 않지요. 론 밸리에서조차도 나쁜 해에는 풋내나는 빈약한 몸집에 향신료향은 너무 강한 불균형을 보일 때도 있잖아요? 한국에서는 좀... 저도 벌써 감기가 걸려서... 콜록콜록! "

으~ ! 이력서를 든 스테판의 손이 높이 올라갔다.
아니, 이 녀석아, 그럼 왜 이력서는 들고 나타난거야 ! 여기는 샤또 베스트와인의 품종 면접실인 것 몰라!

" 그게... 그게... 전 그냥 친구따라 왔는데... 누가 떠밀어서...그만...엉겁결에.. 들어왔어여... *^_^*"

중앙대 와인 소믈리에 과정 교수
손 진 호


1. 알이 빽빽하게 잘 박혀 있다는 뜻.[_본문으로_]

2. Bin95 라고도 불리는 호주 최고의 와인. 초기엔 Grange Hermitage라고 불리었으나, 이제는 너무도 유명해서 그냥 Grange라고만 쓴다. 최근에는 100% Shiraz로만 만들며, 새 미국산 오크통에서 18여 개월 숙성시킨다.[_본문으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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