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 리슬링(Riesling) 이라고 해.
내가 스테판의 머릿속에 제 일착으로 떠오른게 당연하지!!! 70년대 한국에서 포도주를 만들려고 했을 때도 선택된 게 나 아니었겠어 ? 그 뿐 아니라 그 이전에도 중국에서, 일본에서 처음 포도주를 만들려고 했을 때도 역시 나를 선택했지.


이유는…? 나니까 ! (-.- … 음, 리슬링이 TV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군.)

귤이 월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던데, 그만큼 기후가 중요하다는 얘기 아니겠어 ? 그게 아니면 멀쩡하던 귤이 왜 탱자가 되냐고~. 우리 또한 마찬가지야.

무더운 기후를 좋아하는 애가 있고, 추운 날씨를 선호하는 친구도 있어.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편이지.

에스키모인들을 지중해쪽에 데려다 놓고 살라고 해 봐, 어디 잘 사나. 그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추운 북쪽에 살아 삶의 방식은 물론 인체의 구조도 그렇게 길들어져 있어. 땀구멍도 작고, 피부도 두텁고 피하 지방도 많아. 그리고 북쪽의 위도나 고도에 적응되어 있어. 그런 사람들에게 지중해의 열기는 추욱- 쳐지는 무거움을 줄 뿐이야.

이제 이해가 되겠지? 왜 내가 제일 먼저 스테판의 머리에 떠오를 수 밖에 없는지? 한국이나 중국 같은 대륙성 기후에 속하는 국가들에서 나를 주 품종으로 선택한 것도 바로 내가 추운 날씨에도 잘 자라며 강건하기 때문이야.

내 밑둥을 봐. 색깔도 진하고 억세게 생겼지? 영하 20도의 추위까지 견디는 강한 내한성을 가지고 있다니까. 마치 등뒤로 차가운 눈보라를 일으키며 등장하는 (일본 만화에서) 차가운 설국 공주의 이미지 랄까? 호호호!

내 고향은 독일. 그것도 하이네와 로렐라이로 유명한 라인 모젤 지역.
여러 역사 기록에 의하면 내가 로마 점령기서부터 알프스 이북 지역에서 자라고 있었다고 해. 그러다가 15세기를 기점으로 폭 넓게 재배되기 시작했고, 드디어 1716년경부터는 라인가우 지방의 단일 품종으로서 마치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샤르도네(Chardonnay)가 누리고 있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야.

더구나 독일 사람들은 나를 가지고 많은 변종을 만들어 내었지. 사실 나는 만생종이라 늦게 완숙에 이르기 때문에 독일의 추운 가을 날씨와 습기를 생각할 때 항상 걱정거리였거든.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양질 와인 생산의 북방 한계선에 위치한 독일에서는 '어떻게 하면 더 햇볕을 많이 받게 해서 포도를 익게 할까' 가 큰 고민거리야.

그래서 가장 햇볕을 많이 받는 명당자리를 나에게 할애해 주고, 토양이나 지표층의 반사율이 높은 곳, 큰 바위가 둘러싸여 있어 열의 보관과 방사가 용이한 곳, 차가운 안개가 덜 끼이는 곳 등에는 어김없이 내가 자라고 있지.

이 걱정거리들을 해결하기 위해 뮐러 투르가우(Muller-Thurgau1)처럼 조금 더 일찍 익을 수 있는 변종이 많이 만들어졌고, 양적으로는 이미 나를 능가해서 재배되고 있어. Muller-Thurgau 가 나보다 빨리 익기 때문에 가을 추위와 습기를 덜 걱정해도 되거든. 쩝~ ( 리슬링의 씁쓸한 이 기분을 누가 알리요~)

그러나 이렇게 40여종의 변종이 난무하고 있지만 질적으로는 역시 고상하고 섬세한 "원조 할매" 리슬링을 따라 갈 수 없지. 오직 나, 리슬링만이 최후의 완숙에 이르러서도 충분한 당분과 함께 "합당한 산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야. 이러한 능력은 늦수확한 포도로 달콤한 와인을 만들 때 더욱 더 빛이 나게 되지. 우하하 !! (다시 유쾌해진 우리의 리슬링)

워낙 껍질이 튼튼한데다가 독일의 늦가을이 덥고 건조하지 않기 때문에 프랑스의 쏘테른 Sauternes에서처럼 Botrytis 현상이 늘 일어나지는 않지만, 일단 이 귀부 현상이 나타나는 포도로 만든 리슬링 와인은 그 향과 맛의 복잡미묘함을 이루 설명할 수가 없어.

워낙 늦게 수확하다 보니깐 흥미있는 규칙도 많아서, 유명한 St-Nikolaus Wein을 만들기 위해서는 12월6일에 수확하고, Christwein을 만들기 위해서는 12월24일에, Dreikonigswein을 위해서는 이듬 해 1월6일에 수확해. 하지만 걱정마.

이렇게 늦게 수확해도 난 강하고 고결한 산도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십년, 이십년이 지나도 초기의 신선함과 세월의 무게를 동시에 간직하게 되지. 바로 이것이 세계 최고의 화이트 와인으로서의 리슬링의 가치야.

와인을 좀 마셔보신 분들은 곧잘 나하고 미스터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하고 비교하곤 해. 사실 스테판도 인정할 정도로 이 두 품종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아. 둘 다 향이 풍부하며 일정한 산도가 주는 신선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나 조금만 더 주의한다면, 내가 소비뇽보다 꽃향기쪽으로 더 풍부하며 더 달콤한 느낌을 준다는 점을 눈치 챌 수 있지. 그리고 장기숙성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소비뇽과 대별돼. 좀 더 우아하게 표현하자면… 감수성과 강건함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품격있는 와인…이라 할까??

나의 최고의 떼루아르(Terroir)는 물론 독일이지만 그 밖의 세계 각국에서도 잘 자라. 프랑스의 알자스 지방, 미국의 서북부 및 동부 지역, 호주의 Barossa 밸리, 뉴질랜드, 남아공 등등 각국의 기후와 토양에 따라 약간씩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지.

예컨데 온대성 기후를 만나면 화이트 와인으로서의 매력을 유지하기에는 조금 무겁고, 한대성 기후에서는 반대로 완숙에 이르지 못해 풋풋한 풀냄새가 많이 나는 경향이 있지만… 어쩌것어~ 나도 내 개성이 있는 걸.

그나마… 대단하지 않아? 소위 대부분의 유명한 품종이 프랑스 땅에서 그 명성의 토대를 쌓은 것을 보면, 나 리슬링이 열악한 독일의 기후조건 하에서도 이렇게 빛나는 업적을 쌓은 것은 더 힘든 일이지 뭐야.

말이 난 김에 프랑스로 시집간 내 친구들 애기를 잠깐 해볼까? 걔들은 어쨌든 시집 하난 잘 갔어. 높다란 Vosge 산맥이 병풍처럼 뒷마당을 잘 감싸고 있고, 동남향의 경사가 완만히 흐르는 언덕이 있는 알자스 지방에서 근사한 와인을 생산해 내고 있지.

이곳의 리슬링은 좀 더 산미가 강하며 아주 드라이한 와인을 만드는 경향이 있어. 아시다시피, 독일에서는 약간 달콤하면서 부드러운 와인을 만들잖아. 더구나 알자스 지방의 고급 리슬링은 오크 숙성을 거쳐 그 구조의 견고함과 향의 복잡미묘함이 대단하지. 이 지방의 자랑인 50여개의 그랑 크뤼 포도밭에는 대부분 리슬링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야.

이런 내 자랑이 끝이 없군. 스테판이 자꾸 시계를 보는 것도 신경 쓰이지만, 마지막으로 한마디…
지난 70년대처럼 이번에도 내가 여기 "샤또 베스트와인"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군. (쩝…리슬링양이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군)

하지만…!!

스테판, 당신도 말했듯이 "알자스의 카이저베르그, 그랑 크뤼 슐로쓰베르그 (Grand cru Schlossberg)"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중앙대 와인 소믈리에 과정 교수
손 진 호


1. Muller-Thurgau는 리슬링과 실바너의 교배종으로 1882년 개발되었다. 독일 포도경작 면적의 약 24%를 차지하고 있는 최대 품종이다. 반면, 리슬링의 점유율은 21%로 최근에 다시 증가하는 경향이다.[_본문으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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