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따스한 햇볕이 남아 있는 오후, 양재천 둑방에 앉아 있는 스테판1의 귓가로 포도밭을 다지는 트랙터 소리가 멀어진다. 그의 눈은 물끄러미 손에 쥔 한 권의 와인 잡지에 머물렀다.


팀 몬다비 Tim Mondavi2가 프랑스 랑그독 지방에 포도밭을 새로 가꿀 것이라는 소식에 스테판은 만감이 교차한다. 함께 와인 공부를 할 때만 해도 같은 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엄청난 포도원의 상속자" 와 "한국의 이름없는 와인 생산자"의 차이로 벌어지지 않았는가.

늦가을로 접어 드는 바람 또한 스산하다.

"음- 이제 우리도 무언가를 할 때가 되었어!"

최근의 한국 와인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고, 여러 포도원들도 이미 생겼거나 땅을 일구고 있는 중이지 않는가. 갑자기 주먹에 힘이 들어감을 느낀 스테판은 벌떡 일어나 공사가 진행 중인 포도밭으로 달려간다.

프랑스에서 와인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스테판이 선택한 지역은 서울 강남구의 도곡동 땅이었다. 처음 이곳을 본 순간, 스테판은 프랑스 알자스의 카이저베르그를 떠올렸다. 그랑 크뤼 슐로쓰베르그 (Grand cru Schlossberg)가 자리잡고 있는 언덕과 Weisbach천이 흐르는 그 지역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매봉산과 구룡산이 남북으로 찬바람과 습한 바람을 막아주는 곳, 그리고 양재천이 바로 옆에 흐르면서 이곳 골짜기를 적셔주고 있다. 비록 수량은 적지만 잘 개발한다면 포도 재배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전체적으로 완만한 경사를 보이고 있어, 특별히 포도 재배에 따르는 여러 가지 작업들도 용이할 것이다. 바로 이 경사지에 포도밭을 조성한다면 배수도 잘되고 햇볕을 받는 각도도 좋아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매봉산의 남쪽 자락은 그 방향과 경사도가 아주 일품이라 스테판의 마음을 자못 설레게 하는 곳이다. "음- 역시 Grand terroir 야!" 양재 밸리를 가득 채운10월의 따뜻한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이 정도 일조량이면 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동안 귀가 따갑게 "떼르와르(Terroir)"의 개념을 배우고 보아왔으면서도 이렇게 직접 자기가 포도를 재배할 곳을 고르다 보니깐 그 느낌이 확- 다가옴을 스테판은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포도원 이름은 이미 프랑스에 있을 때부터 정해 두었었다. 최고의 와인을 만들자는 뜻과 최고의 포도원이 되겠다는 의미에서 샤또 베스트와인Chateau Best Wine 이라고…

이제 남은 일은 이 Terroir에 적합한 포도 품종을 선정하는 것. 스테판은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포도 품종은 각각의 특성과 개성이 있고 그에 따라 자기가 선호하는 토양과 기후가 따로 있다. 더운 지역에서 잘 자라는 품종이 있는가 하면 선선한 기후를 선호하는 녀석도 있다. 자갈밭을 좋아하는 애가 있는가 하면 서늘하고 찰진 점토성 토양을 선호하는 친구도 있다.

지난 번 랑그독 지방에서 실습할 때, 삐노 누아 (Pinot noir)와 리슬링 (Riesling)을 심었다가 호되게 실패한 경험이 있는 스테판이라 고국에서 그 실수를 되풀이 할 수는 없었다. "팀 Tim도 역시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야" 라고 스테판은 되뇌었다. 결국 그 품종이 선호하는 기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물론 문제는 이처럼 간단치 만은 않다. 토양의 성질도 따라줘야 하는 것이다. 이제 지형적인 요건으로 선택된 이 포도밭에 맞는 어떤 포도 품종을 선택해야 할지는 전적으로 스테판의 재능과 판별력에 달려 있다.

이제부터 할 일은 토양 샘플을 채취해 성분 분석을 의뢰하는 일이고, 하부토(Sub-soil)와 상부토(Soil)의 깊이와 질적 연계성을 파악하는 일이다. 또한 한 품종만을 심을지 (마치, 부르고뉴 포도주처럼), 두 품종 이상을 심어 블랜딩할지 (흡사 보르도 와인처럼) 결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단일 품종이 주는 심플하며 정직한 퍼포먼스를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블렌딩을 통한 조화와 균형에 가치를 둘 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포도주는 포도로 만든다는 평범한 진리는 스테판이 양조를 시작한 때부터 줄곧 따라다니던 화두였다. 좋은 포도에서만 좋은 포도주를 만들 수 있음을 알기에 그는 포도 선정에 가장 많은 시간을 기울일 것이다.

몸을 굽혀 한 웅큼의 흙을 펐다. 한동안 그 색깔을 지켜보던 스테판은 이윽고 코로 가져가 길게 냄새를 맡는다.

" 씨익- ! " 미소짓는 그의 머리엔 어떤 포도 품종이 떠올랐을까?

중앙대 와인 소믈리에 과정 교수
손 진 호


1. 가명, 프랑스에서 와인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한국인. 소장파로서 한국의 와인 문화 보급을 위한 사명감을 갖고 귀국. "샤또 베스트와인"의 와인메이커. 아는 사람은 다 알것임.[_본문으로_]

2. Robert Mondavi의 둘째아들, 1999년 4.3억$의 판매고, 7백만 상자의 와인을 생산하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Robert Mondavi Winery의 상속자 중의 하나. La Revue du France 2000년 10월호의 기사를 참조하기 바람.[_본문으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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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테루아와 포도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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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03.12.11 Category와인의 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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